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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유도회 소개

성균관유도회총본부 구성

공부자(孔夫子)의 중용지도(中庸之道)와 극기복례(克己復禮)의 정신(精神)으로 수제치평(修齊治平)의 대도(大道)를 실천(實踐)함으로써 시대(時代)의 사조(思潮)를 정화(淨化)하고 퇴패(類敗)한 풍습(風習)을 쇄신(刷新)하여 도의사회건설(道義社會建設)을 목적(目的)으로 구성하였던 유도회총본부(儒道會總本部)가 본의 아니게 몇몇 인사(人士)의 질시(嫉視)와 반목(反目)으로 파벌(派閥)이 조성되고 분규(紛糾)가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다년간(多年間) 그 기능(機能)조차 발휘(發揮)하지 못하던 중 5.16 군사정부(軍事政府)에서 1963년 5월23일자 포고령(布告令) 제6호로 해산(解散) 되기에 이른다.

1964년 5월10일 전국유림총회(全國儒林總會)는 유도회(儒道會)를 재건(再建)키로 결의(決議)하고 전국 230명 유도회 지부장(支部長) 가운데 163명 (그 외는 향교의 전교 가 겸임) 지부장의 요청으로 과거 모든 유도회 분규(儒道會 紛糾)를 수습(收拾)하고 전국대회(全國大會)를 소집하여 참신(斬新)한 유도회 재건의 사명을 당시 성균관 관장단(成均館 館長團)과 재단법인(財團法人) 성균관 이사진(成均館 理事陣)에게 위임(委任)하여 유도회수습위원회 (儒道會 收拾委員會)를 조직하였다.

그간 유도회수습위원회는 십수년(十數年) 누적(累積)되어오던 유도회의 혼란(混亂)을 정비(輕備)하기 위하여 유림의 단결(團結),불평이탈분자(不平離脫分子)의 포섭(包攝),당국(當局)과의 유대(有對),재원확보(財源確保)등 소기(所期)의 목적달성(目的達成)에 매진(邁進)하였으나 재단 기능의 부진(不振)으로 시일(時日)이 천연(遷延)되어 오던 중 재단법인(財團法人) 성낙서(成樂績) 성균관이사장(成均館理事長)을 위시(爲始)하여 재단이사진(財團理事陣)과 권충해(權忠海) 성균관장(成均館長) 및 이재서(李載瑞) 실무부관장(實務副館長)의 꾸준한 노력으로 유도회 수습에 착수하여 도의천명(道義關明)을 위주(爲主)로 하고 교화사업 (敎化事業) 에 전념(專念)하는 유도회 조직을 추진(推進)하였다.

한편 일부 불순분자(不純分子)들은 1969년 10월21일 시내 대성빌딩에서 불법 집회를 열어 유도회를 참칭(僭稱)하려던 시도(試圖)가 실패로 돌아가자 그 뜻은 이에 그치지 않고 1969년 1월에는 사단법인(社團法人) 유도회(儒道會)의 간판(看板)을 들고 또 다시 유림의 분열(分裂)을 자행(恣行) 하려 하였다. 이에 양식(良識)있는 전균 유림들은 성균관을 떠난 유도회는 있을 수 없다는 원칙(原則) 하에 하등(何等)의 유예(猶豫) 도 없이 본(本) 성균관(成均館) 산하(傘下)의 유도회는 전국적 조직을 착착(着着) 진행시켜 1968년 12월3일에 충청남도(忠淸南道) 유도회본부(儒道會本部) 결성(結成)을 시 작으로 1969년 4월13일에는 충청북도(忠淸北道),같은 해 4월27일에는 경상북도(慶尙北道),10월5일에는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10월9일에는 강원도(江原道),10월10일에는 경기도(京鍵道),10월11일에는 전라북도(全羅北道),10월12일에는 전라남도(全羅南道),10월14일에는 경상남도(慶尙南道) 및 부산직할시(釜山直轄市)의 순으로 제주도(濟州道)를 제외(除外)한 전국 10개 시도본부(市道本部) 결성을 완료(完了)하고 그간의 허다(許多)한 파란곡절(波瀾曲折)을 극복(克復)하여 1970년 6월21일 유도회 총본부 결성대회를 열어 유도회 총본부를 재구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