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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유도회 소개

성균관유도회총본부 연혁

1945년 8ㆍ15광복 이후 전국유림대회가 처음 열린 것은 1945년 11월30일이었다. 서울 성균관 명륜당에서 남북조선의 유림 천여 명이 참집한 전국유림대회는 6일 동안 열렸다. 이 대회에서는 민족고유문화의 근간인 도의의 혁신과 향상, 성균관대학의 설치, 이를 위한 재단의 완성 등을 결의하였다.

유림대회는 이후에도 자주 열렸는데 소위 유림이라고 자처하는 인적 구성의 성격은 복잡다단하여 친일 타협적인 황도유림으로부터 독립운동가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좌ㆍ우파에 걸쳐 있어 단순하지 않았다. 여기에다 지역과 학맥에 따른 이해와 갈등이 상충되어 그 분립적 양상이 정리ㆍ통일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유도회는 문선왕 공부자의 도덕을 근간으로 하는 국민의 윤리도의 정신을 함양케 하고 수제치평(修齊治平)의 대도(大道)를 천하에 선포하여 이를 실행하게 하는 목적으로 전국 500만 유림의 총의에 의하여 설립된 유자의 총림이었다.

설립 이후 유도회는 성균관과 지방 향교 발전에 관한 사업과 교육, 교화, 학술 등에 관한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였고 김창숙 선생은 유교대학 설립에 필요한 재단 구성을 위하여 성균관대학 기성회를 결성, 재산(토지)을 기부 받고, 재단법인 선린회와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구성하였으며, 1946년 9월25일 문교부(미군정청)로부터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정식으로 인가 받았다.

특히 성균관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전국에 흩어져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고 재산을 기부 받아 유학을 교시로 하는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문교부에 종합대학으로 승격 신청하여 1953년 2월 6일에 정식 인가를 받게 되었다.

1956년에 재단의 기본재산에 대한 부정처리 문제와 성균관대학교총장의 교체 문제를 둘러싸고 마찰과 갈등이 일어나, 이것을 수습하기 위하여 그해 2월 21일에 유도회총본부 임시중앙위원회가 소집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우세를 위원장으로 하는 수습대책5인위원회를 구성하여 앞으로 유도회전국대회를 소집할 때까지 유도회를 비롯하여 재단ㆍ대학교ㆍ성균관에 대한 모든 수습대책을 위임하게 되었다.

이후 유도회 내부의 대립이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실세 쟁탈전이 전개 되었으며, 법통을 가리기 위한 소송사건도 연이어 제기되었다. 이렇게 법통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과 소송 사건이 이어지다가 1961년 군사정권의 포고령 제6호로 유도회총본부가 해체되어 그 활동이 정지되고 1963년에는 교육법에 의하여 재단법인 성균관과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교가 분리되었다.

그 뒤 1964년 5월에 전국 향교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그동안 유도회 분규의 종식과 유도회의 재건을 다짐하고 그 실현을 위한 전국 대표자대회의 소집을 성균관장단과 재단법인 성균관이사단에 위임하였는데, 성균관장단과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회에서는 유도회수습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1970년에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이가원씨를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으로 선임하고 조직을 완료함으로써 재단법인 성균관 그리고 성균관과 함께 삼위일체 체제를 이루는 유도회가 재건되었으며, 1994년에는 유도회 정관을 개정하여 총본부 위원장의 명칭을 회장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