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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유도회 소개

성균관 유도회 연혁

1945년 8ㆍ15해방 이후 전국유림대회가 처음 열린 것은 1945년 11월 30일이었다. 서울 성균관 명륜당에서 전국의 유림 천여 명이 참집한 전국유림대회는 6일동안 열렸는데, 이 대회에서는 민족고유문화의 근간인 유교도의의 혁신과 향상, 성균관대학의 설치, 이를 위한 재단의 완성 등을 결의하였으며, 유림대회는 이후에도 자주 열렸다.

1946년 1월 19일의 전국유림통일대회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조선을 원조한다 함은 감사하나 조선의 독립을 승인하고 국교적인 원조를 해주기를 원한다”는 건의서를 미ㆍ소ㆍ영ㆍ중 4개국에 보내기로 한 결의 등은 조선의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운동으로 유림의 역량이 방향을 잡아가는 바람직한 현상이기도 하였다.

2월 10일에는 오랫동안 분립되어오던 유도회의 간부회의를 성균관에서 개최하고 완전히 합동하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아, 3월 13일 전국유림대표자대회를 열어 유도회의 조직을 개정키로 하였다. 마침내 1946년 3월 13일 전국유림 2,500여명이 성균관 명륜당에서 열린 유도회 창립총회에서 김창숙 선생을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김창숙 선생은 유교대학 설립에 필요한 재단 구성에 역량을 집중하여 우선 성균관대학 기성회 결성을 하여 독지가인 이석구씨로부터 재단법인 학린사로부터 재산(토지)을 희사받고, 재단법인 선린회와 명륜전문학교 재단을 통합하여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구성하였으며, 1946년 9월 25일 문교부(미군정청)로부터 성균관대학의 설립을 정식으로 인가 받았다.

김창숙 선생은 성균관대학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전국에 흩어져있는 향교재단을 규합하고 재산을 새로 기부받아 재단법인 성균관대학을 강화하여, 문교부에 종합대학 승격을 신청하여 1953년 2월 6일에 정식 인가를 받게 되었다. 1956년에 들어 재단기본재산의 부정처리 문제와 성균관대학교 총장의 교체 문제를 둘러싸고 마찰과 갈등이 일어나, 이것을 수습하기 위하여 그해 2월 21일에 유도회총본부 임시중앙위원회가 소집되었는데, 이 자리에서 이우세를 위원장으로 하는 5인수습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앞으로 유도회전국대회가 소집될 때까지 유도회를 비롯하여 재단ㆍ대학교ㆍ성균관에 대한 모든 수습대책을 위임하게 되었다.

이후 유도회 내부의 대립이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실세 쟁탈전이 전개 되었으며, 법통을 가리기 위한 소송사건도 연이어 제기되었다. 이렇게 법통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과 소송 사건이 이어지다가 1961년 군사정권의 포고령 제 6호로 유도회 총본부가 해체되어 그 활동이 정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유도회는 법적으로 완전히 공백상태에 들게 되었으나 1964년 5월 10일에 전국 향교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그동안 유도회 분규의 종식과 500만 유림의 총단결로 유도회의 재건을 다짐하고 그 실현을 위한 전국 대표자대회의 소집을 성균관장단과 재단법인 성균관이사단에 위임하였는데, 성균관장단과 재단법인 성균관 이사회에서는 유도회 수습위원회를 조직하여 사명 수행에 매진하게 하였다.

이후 1970년에 전국대표자대회에서 이가원씨를 유도회 총본부 위원장으로 선임하고 조직을 완료함으로써 재단법인 성균관 그리고 성균관과 함께 삼위일체 체제를 이루는 유도회가 재건되었으며, 1994년에는 유도회 정관을 개정하여 총본부 위원장의 명칭을 회장으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